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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범섭 인서점 대표 |
6월 민주항쟁 스무돌이다. 그렇지만 그 스무돌을 기념하는 우리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세계 민주주의 운동사에 빛나는 승리로 세계의 찬사를 받았던 저 87년의 영광은 이제 이 땅 어디에서도 그 빛나는 기색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때 우리가 처절했던 항쟁의 끝에서 잔혹하기 짝이 없던 파쇼정권으로부터 '6.29선언'이라는 항복을 받아냈던 것은, 실로 대한민국 정권수립 이후 가장 빛나는 민주주의의 성취가 아닐 수 없었다.
이제 그때의 그 영광과 열광은 다 어디로 갔는가. 진정 역사의 청맹과니들이 말하는 대로 항쟁주역은 무지했고 무능했고 무력했단 말인가. 그리고 진실을 배신했고 역사를 배신했단 말인가. 그래서 87년 6월 정신은 애초부터 허구였으며 실종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이제는 그때의 그 파쇼집단에 정권을 넘겨주어야 한단 말인가. 그래서 철없는 민주주의 세력은 또 다시 '빨갱이 집단'이라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국가보안법의 언저리를 맴돌아야만 하는가. 참으로 어이없는 말들이 기이한 괴변과 논리로 우리의 정신과 가치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87년 6월항쟁을 묶어 세웠던 '민주' '민족' '민중'의 세 가치는 옳았다. 옳았기 때문에 학생운동이 지핀 작은 불이 번져나가 역사를 바꾸는 들불로 타 오르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은 옳은 가치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되짚어 가면서 꼬치꼬치 따져보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저 스무 해전의 운동, 그 87년 6월항쟁의 '정신이 내 걸었던 깃발' 민주, 민족, 민중의 세 가치가 순수한 정치적인 문제로 해석해야 하는가 더 나아가 경제적인 문제로까지 확대 해석해도 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야말로, 6월항쟁의 성패를 가리는 잣대이며 6월항쟁 주역들의 능력과 배신을 판별하는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왜 그런가. 우리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87년 6월은 군사독재의 절정기였다. 양심적인 지식인이나 노동자, 농민, 종교 지도자, 대학생 그 누구도 자신의 지적 양심이라든가 자신이 처한 현실의 절박한 사정을 밖으로 말하거나 표현할 수 없었다. 만약 그런 사정이 외부에 알려지고 그것이 정권의 위신을 떨어뜨리거나 비위라도 상하게 하면 그 즉시 빨갱이로 몰려 감옥에 갇혀야 했다. 온갖 고문에 견디다 못해 끝내는 국가보안법 사슬에 묶여 정권의 연장과 정당성의 제물로 바쳐졌다.
저 광주 5월 민주항쟁이 그랬고 박종철의 죽음이 그랬고 이한열의 죽음이 그랬지 않았던가. 그런 역사의 질곡 앞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단 한 번의 여야 간 정권교체를 이룩하는 데도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고문을 당해야 했고 도망다녀야 했으며 감옥에 가야 하지 않았던가. 내 친구가 그리고 나의 형제가 또 나의 아들과 누이와 오빠가 그렇게 당하던 그 참혹한 광경을 우리의 눈으로 자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그래서 87년 6월의 저항운동은 그 어떤 가치보다도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민주주의로 민족의 통일을 이룩하고 민중이 잘 사는 세상을 건설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날 우리가 외쳤던 민주, 민족, 민중은 그래서 그때부터 우리의 정치적 상황을 지배하는 역사의 이념이었고 정신적 흐름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후 김대중 정권이나 특히 노무현 정권에 대한 비판에서 '경제'라는 용어가 '민주주의'라는 용어에 어색하게 올라 앉아서 작동되는 것을 보게 된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이런 어색한 비판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수긍하는 듯한 태도를 견지해 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아주 잘못된 것이다. 6월항쟁 이후의 모든 정권이 다 그렇지만 특히 순수한 시민정권의 성격을 띠고 있는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은 어느정도 파쇼정권과의 절충적이었던 노태우 김영삼 정권에 비해 태생적으로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상처 받은 이 땅의 민주주의를 치유하는 사명을 짊어 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두 정부는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했으며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고 평가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역사를 담당한 주체로서의 국민의정부나 참여정부가 정치적 민주주의에만 의무를 짊어지고 있고 거기서 의무가 다 끝나는 것이 아님을 모르지는 않는다. 민주주의와 함께 더불어 발전하는 경제적발전의 과실을 평등하게 분배하는 경제민주주의에도 응당한 의무가 있음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대응가치의 선차 문제를 뒤섞어서는 안 된다.
특히,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수구세력이 자신의 정권상실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통해 자신의 정신을 우리 역사가 가야 할 희망과 꿈과 이상으로 다가오려는 사려 깊은 반성은커녕 오히려 빼앗긴 정권에 대한 절치부심으로 온당하지 못한 지역감정과 기득권에 바탕을 둔 거대 지방조직을 활용하여 민주진영을 반격하면서 선후가 바뀐 경제민주주의라는 가치로 민주진영을 공격하는 것이 있다는 그 논리의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효율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민주주의라는 가치의 실현을 위해 바로 그 수구세력과의 싸움에서조차 버거움에 더하여 효율성을 내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와 같은 가치의 착시현상이 민주진영에 대한 반격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는 민주진영에도 상당부분의 책임이 있다. 87년 6월 항쟁이 6.29선언이라는 빛나는 성과를 거두자 항쟁의 주역들은 일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더러 정치적인 공간에 남아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들조차 민주주의라는 역사의 공적가치보다는 자신의 일상이 요구하는 사적가치의 공간으로 돌아감으로써 사실상 민주주의라는 가치의 실현주체는 이 땅의 역사공간에서 증발되고 말았었다. 반면에 정권을 빼앗긴 수구세력은 국제 구제금용의 시기까지 약 10년의 잠복기를 거쳐 신자유주의라는 공간을 활용하면서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운 희망과 꿈을 키워가는 호기를 맞아 이와 같은 기이한 논리로 무장하면서 조직을 확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편, 민주진영은 소수의 사람들이 정치권력에 대한 욕망을 분출하기는 했어도 대개의 사람들은 국가 권력의 문제보다는 사회주의 붕괴라는 사실 앞에서 그리고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시대의 시장논리 앞에서 각자의 생각이 안고 있는 문제를 풀기 위해 각각의 가치를 안고 흩어져서 저 사무엘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각각의 골방으로 들어가 동서고금의 모든 주장을 끌어 안고 거기서 무슨 새로운 희망을 생성하고자 하는 관념세계의 백성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근래, 시민운동단체나 민주노총 또는 민주노동당이 몇몇 소수의 옹고집을 드러내면서 소아병적 사조직화 현상 같은 작태를 보이면서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전체를 망가트리는 것을 일상으로 보게 되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는 민주주의와 민중과 민족을 위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역사 보다는 자신으로의 여행을 떠난 사람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참여정부의 기한도 다하고 이제 년 말의 대선이 정권의 향방을 판가름하게 되었지만, 똘똘 뭉치는 수구세력에 비해 골방에 걸어 놓은 자신의 등불만이 세상을 환하게 비출수 있다고 옹고집을 부리는 민주진영의 모습은 안타깝다 못해 금방이라도 달려가서 주먹을 올려 부치고 싶은 심정이 아닐 수 없다. 나라가 죽든지 민족이 죽든지 민주주의가 죽든지 민중이 죽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등불만 주장하는 우물 안 개구리들이 이제는 우물 밖으로 뛰어 나와서 더 큰 세상의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다.
생각해 보라. 꼭 반세기, 그 긴 세월을 두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고 눈물을 흘렸고 감옥을 가야 했으며 도망을 다녀야 했던가.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이 겨우 첫 정권 교체였다. 생각해 보라. 87년 6월의 민주항쟁은 우리에게 세상을 보는 새로운 강줄기로 다가 왔다. 저 강 건너의 반민주세력이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강을 건너서 우리에게 다가 오지 않는 한 그들에게 정권을 내 주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87년 6월항쟁을 부정하는 것이며 역사를 배신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민족의 통일과 민중을 배신하는 것이다. *
서울지역 인문사회과학서점모임 대표
심범섭 (건국대학교 앞 인서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