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살인에 숨죽인 필리핀 '피플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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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살인에 숨죽인 필리핀 '피플파워'
  • 석희열 기자
  • 승인 2007.05.28 16: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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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에 3건꼴 진보인사 암살... 5월 총선 '피의 선거' 우려
 

   
 
▲ 지난 1월 17일 필리핀 미 대사관 근처에서 "미군 철수" "아로요 퇴진"을 외치며 시위를 벌이던 청년정당(KABATAANPARTY) 소속 대학생들과 경찰이 충돌해 한 학생이 피를 흘리고 있다.
ⓒ 지은
 
필리핀이 심상치 않다. 1주일에 3명꼴로 참혹한 정치적 살인이 벌어지고 있다. 국제사회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지만 피의 살육은 5월로 예정된 총선으로 향하고 있다.

25일은 1986년 마르코스 독재정권을 민중의 힘으로 무너뜨린 '피플 파워(peple power)' 21주년이 되는 날이다. 지금의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 또한 2001년 1월 폭발한 2차 피플 파워로 권좌에 올랐다.

5월 총선 앞두고 진보인사 암살 늘어

필리핀 인권단체 까라빠딴(karapatan) 집계에 따르면 아로요 정부 아래서 정치박해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2007년 2월 23일 현재 883명. 납치돼 실종된 사람까지 합하면 1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재야 정치인, 언론인, 종교인, 학생 등 대부분 진보 활동가들이다.

24일 오후 서울 아현동 '경계를 넘어' 사무실에서 이 단체 활동가 지은씨와 필리핀 민중운동조직 바얀(bayan)에서 활동하고 있는 마크(Mark·33)씨를 만나 필리핀 사태의 심각성을 들었다. 지은씨는 1~2월 한 달 동안 필리핀 현지를 방문하고 최근 돌아왔다.

"필리핀에 머무는 동안 바얀을 하루 방문했는데 마침 그날 정치 살해 사건이 터졌다. 현지 활동가들의 얘기로는 이런 사건이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필리핀의 심각한 정치상황을 실감했다. 헬멧(복면) 쓰고 오토바이 탄 사람만 봐도 소름이 끼쳤다."

2004년 재집권에 성공한 아로요 대통령은 부정선거와 가족 비리 혐의로 위기를 맞자 지난해 2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부정선거로 필리핀 정국이 들끓던 2005년 이후 정치 살해가 급증했다. 암살을 위해 저격수까지 고용되고 있다. 검은 헬멧에 오토바이를 탄 이들은 총으로 대상자를 납치 또는 살해한다.

아로요 정부는 이러한 정치 살해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일련의 암살에 대해 정치적인 살해라기보다 좌파 진영 내부의 세력 다툼 내지 단순한 살인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필리핀 정부는 또 까라빠딴의 사망자 공식집계도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반정부세력은 아로요 정권의 말을 믿지 않으며 군부가 정치 암살에 깊이 개입된 것으로 여기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하고 있는 아로요 정권은 이른바 '자유수호작전(OBL)'을 펼치면서 국제사회로부터도 군사문화를 확산시키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 지은(왼쪽·경계를 넘어 활동가)씨와 필리핀과 한국을 오가며 민중운동을 조직하고 있는 마크씨가 24일 오후 서울 아현동 '경계를 넘어' 사무실에서 만나 필리핀의 정치상황에 대해 얘기하면서 웃고 있다.
ⓒ 데일리경인 석희열
 
"필리핀정부, 군부 연관성 일부 시인"

"필리핀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최근 유엔 특별보고관 필립 알스톤 교수가 마닐라에 왔다. 알스톤 교수는 열흘간 멜로위원회(필리핀 정부가 꾸린 진상조사위원회)와 피해자 가족, 시민단체 활동가들을 직접 인터뷰한 뒤 조사보고서를 지난 21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필리핀 사태의 가장 주요한 원인으로 군부와 OBL을 꼽았고 그 책임자로 팔파란 장군을 지목했다. 알스톤 교수는 필리핀 정부와 군부가 변하지 않으면 비사법적 살인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이에 필리핀 정부는 바로 다음 날인 2월 22일 기자들에게 멜로위원회의 보고서를 공개하고 일련의 사태에 대한 필리핀 군대의 연관성을 일부 시인했다. 예상대로 팔파란 장군 등 군 고위 관계자 여러 명이 정치 살해에 깊이 관여되어 있음이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마크씨는 이어 필리핀 사태의 미국 관련설을 강하게 제기했다. '피플 파워'의 위력을 너무도 잘 아는 아로요 대통령이 부정선거와 두 번의 탄핵정국 등으로 위기에 몰리자 정권 안보 차원에서 미국을 끌어들여 필리핀을 군사화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OBL 자체가 미 CIA 지부다. 베트남 전쟁 당시 암살조직을 주로 담당했던 CIA 출신의 전 미국대사가 OBL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CIA가 필리핀 사태에 깊이 개입돼 있고 사실상 정치 살인이 미국의 손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 지도에서 빨간점으로 표시된 부분이 진보적 활동가들에 대한 정치적 살해가 이루어진 지역으로 활동가들에 대한 공격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cp-union
 
정치적 살해가 그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2004년 부정선거로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시위가 벌어지자 아로요 정권이 긴장을 한 것이 큰 이유일 것"이라며 "아로요는 대통령 포고령 1017호를 발동해 모든 집회를 금지시키고 또 자유를 수호한다는 이름으로 OBL작전을 펼쳐 반대세력을 탄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은씨는 "필리핀 사태의 핵심은 아로요 정권이 '피플 파워'의 힘을 안다는 것이다. 아로요는 그 혜택을 입은 대통령이면서 '피플 파워'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크다"면서 "결국 부정선거와 탄핵정국을 거치면서 그가 선택한 것은 군대였고, 자신의 두려움이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력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마크씨는 필리핀 사태 해결 방안으로 ▲독립적인 국제조사위원회를 꾸려 진상을 조사한 뒤 ▲아로요 정권에 대해 국내외 압력을 증가시켜 ▲아로요 대통령을 퇴진시키거나 국회 탄핵으로 추방시키고 ▲진보세력이 정권을 잡는 것이라고 밝혔다.

"필리핀 시민사회, 군사문화에 억눌려"

그러면서 지금까지 수도 외곽에서 주로 벌어지던 정치 살인이 5월로 예정된 총선과 맞물리면서 마닐라에 집중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벌써부터 '피의 선거'가 될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다는 필리핀 현지의 분위기도 전했다.

하지만 사태의 심각성에 비춰 필리핀은 현재 매우 조용한 편이다.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군사문화와 공포 분위기에 질려 시민사회가 위축돼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와 관련 지은씨는 "대통령 포고령 1017호가 발동된 필리핀 상황은 긴급조치로 사회를 통제하던 박정희 유신체제를 떠올리면 된다"며 "아로요 정권 규탄 목소리가 커져가고는 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만연해 있는 군사화로 공포 분위기가 가라앉지 앉고 있다"고 설명했다.

끝으로 마크씨는 "아로요 정권은 자신에게 도전이 될만한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참혹한 정치 살인을 벌이고 있다"며 "이러한 반인권적 비사법 살인을 중단시키기 위해 우리는 엄청나게 두렵지만 용기를 내어 싸울 것이고 국제사회의 연대와 도움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기사 입력 : 2007-02-25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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